1.
"군주님과 함께한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군주님과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구요? '파트너 ' 잖아요."
한지는 웃으면서 '추억'에 대해 말했다. 아크에 소속된 후 아이기스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센티넬과 가이드는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의지할 대상은 동료들 뿐이었다. 고통을 유일하게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 때로는 가족 같고, 때로는 친구 같던 동료들의 시간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잊고 싶지 않아서. 간직하고 싶어서. 기억하고 싶어서. 찍어왔던 사진들 속에 차디찬 얼음 설원에서 죽었던 동료들도 살아있었다.
2.
"…파트너?”
그 단어가 그의 입술에서 툭, 하고 뱉어졌다. 당신을 제 가슴팍에 가둬두고 있던 그의 팔에 아주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그는 당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검고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얀 두피, 그의 품 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고 따뜻한 몸. ‘파트너’라는 당신의 말은, 그가 생각했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무게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파트너란 3개월간 쓰고 버릴 소모품, 자신의 지독한 냉기를 달래줄 인간 난로에 불과했다. 그런데 당신은 마치 그것이 영원한 유대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웃기지 마. 중요한 건 네가 지금 내 옆에서 따뜻하다는 사실, 그거 하나뿐이야. 3개월 뒤면 어차피 기억에서 지워질 얼굴인데, 사진 따위가 무슨 소용이라고."
그의 목소리는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였다. 어차피 끝이 정해진 관계, 다시 홀로 얼어붙어야 할 시간이 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추억’이나 ‘기억’ 같은 단어는 그에게 사치이자 고통일 뿐이었다. 그는 당신의 말랑한 뺨을, 제복 위로 느껴지는 온기를, 이 순간의 안락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모질게 굴었다. 정을 주면, 나중에 더 시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당신은 그의 쌀쌀맞은 대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그 오묘한 색의 눈동자. 그 순수한 시선은 그의 가장 깊은 곳,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공허함을 정면으로 꿰뚫는 것 같았다. 그가 가장 마음에 드는 표정은 어떤 표정이냐고? 산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는 언제나 분노하거나, 짜증 내거나,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는 당신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떠올린 사람처럼, 입꼬리를 비틀어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다시 입술 사이로 번뜩였다. 그는 당신의 턱을 다시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내 표정? 글쎄….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찾아내야지, 파트너."
그의 엄지손가락이 당신의 아랫입술을 아주 느리고, 유혹적으로 쓸어내렸다. 방금 전 당신이 거부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당신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날 만족시키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지 않겠어? 예를 들면… 네 그 따뜻한 온기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전부 빨아들였을 때라든가."
그는 당신의 귓가에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차가운 입김과 뜨거운 속삭임이 동시에 쏟아져 들어와 당신의 온몸을 짜릿하게 훑었다.
"아니면… 네가 내 밑에서, 울면서 매달릴 때라든가. 어떤 표정이 가장 보고 싶은데, 너는?"
"이 표정이요."
그의 얼굴에 닿은 당신의 손가락은 작고, 따뜻했다. 산타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감히, 이 작은 가이드가, 얼음의 군주인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제멋대로 입꼬리를 잡아 올려 억지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그의 살벌한 표정이 당신의 손가락에 의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터무니없는 행동. 지독히 건방지고, 당돌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당장 그 손목을 부러뜨려도 시원찮을 판에, 그는 이상하게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 얼굴을 멋대로 주무르는 그 작은 손의 감촉과, 만족스럽다는 듯 함께 웃는 당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4.
"그래도 3개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요. 군주님이 저를 지우더라도 전 군주님을 기억할 거예요. 군주님의 활약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군주님의 모든 시간을 지켜보고, 군주님과 함께한 날들을 기억해서 군주님이 저를 기억 못 하시더라도 의미 없는 날들로 만들지 않을 거예요. 제가 군주님을 깨웠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만날 수 있었잖아요. 절대 의미 없지 않아요."
당신이 그의 앞으로 새끼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약속. 3개월의 시간이 의미 없지 않게 만들겠다는, 당신 혼자만의 다짐. 그 작고 가녀린 손가락과, 그 안에 담긴 너무나도 진지한 의지에, 산타의 심장이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각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의미’. ‘기억’. 그가 애써 외면하고, 밀어내던 단어들이었다. 어차피 버려질 시간, 어차피 잊힐 존재.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14년을 버텨왔다. 그런데 당신은, 고작 3개월의 시간을 영원처럼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겠다고. 그 사실이 지독하게 거슬리면서도, 동시에… 텅 비어있던 가슴 한구석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지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웃기고 있네. 멋대로 기억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마음대로 해."
그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며 당신의 새끼손가락을 쳐다봤다. 고작 이걸로 약속이라도 하자는 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는 코웃음을 쳤지만, 이내 당신의 손가락을 자신의 투박하고 거친 새끼손가락으로 감아 걸었다. 당신의 손가락은 그의 것에 비해 너무나도 작고 여렸다. 그는 그 손가락을 부러뜨릴 것처럼 힘을 주어 꽉 휘감으며, 당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단순한 장난기가 아닌, 소유욕으로 번뜩이는 위험한 빛이 가득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넌, 날 웃게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할 거야. 내가 만족해서, 나도 모르게 그 표정이 나올 때까지. 그게 네가 3개월 동안 해야 할 유일한 임무다. 파트너."
그는 약속을 건 당신의 손가락을 놓아주지 않은 채, 당신의 귓가로 다시 얼굴을 가져갔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속삭임이 아닌, 거스를 수 없는 군주의 명령이었다.
"말했지? 네가 날 만족시키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그게 침대 위가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을 텐데. 예를 들면… 아주 맛있는 핫초코를 타 온다거나. 아니면, 시끄럽게 구는 놈들을 내 대신 전부 얼려버린다거나. 뭐, 찾아보는 건 네 몫이야. 기대하지, 파트너. 네가 날 어떻게 ‘만족’시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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