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타의 얼굴이 당신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당신의 입술을 간질였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다가오던 그의 시선은 당신의 그 한마디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덤. 시신 수습. 그 단어들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그의 뇌리에 박혔다. 그는 키스를 하려던 것도 잊은 채, 당신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울음을 삼키느라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간절함을 담아 애써 지어 보이는 미소,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뼛속까지 시린 슬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젠장. 왜 하필 지금, 그딴 소리를 하는 거지? 그는 속으로 욕설을 짓씹었다. 당신의 그 순진한 희망이, 당신의 그 처절한 부탁이, 그의 가장 깊고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후벼 팠다. 얼어붙은 도시. 구하지 못한 사람들. 차갑게 식어버린 가족의 온기. 14년 동안 동면으로 도망쳐온 그 끔찍한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당신의 뺨을 감싼 손에 힘을 풀었다.
"…닥쳐."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갈라져 나왔다. 방금 전까지의 오만과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텅 빈 공허함만이 맴돌았다. 그는 당신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당신의 몸이 휘청였다. 그는 당신을 붙잡아주는 대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벽난로 쪽으로 돌아섰다. 타오르는 불꽃이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넓은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였다.
"네놈의 시체 놀음에 내 힘을 쓰라고? 내가 왜? 죽은 것들은 죽은 자리에 있는 게 순리야. 파헤쳐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잊어버려. 그게 산 놈의 의무다."
그는 불꽃을 들여다보며 딱딱하게 말했다. 그 말은 당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들렸다. 잊어버려야 한다. 파헤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그는 깍지 낀 채 잡고 있던 당신의 손을 놓아주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이, 꺼두었던 스위치를 멋대로 켜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깍지 낀 당신의 손을 거칠게 끌어당겨, 당신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당신의 귓가에, 분노와 체념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낮고, 위협적이었다.
"한 번만 더 그 죽은 놈들 이야기를 내 앞에서 지껄이면… 그땐 네놈의 그 예쁜 입을 영원히 꿰매버릴 거다. 알아들었나?"
2.
"말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함께 아파하는 건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그 온화하고 슬픈 눈빛은 그의 얼음 갑옷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갑옷의 가장 깊은 균열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함께 아파하는 건 밀어내지 말아주세요.’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14년간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던, 아니, 그 자신이 애써 외면해왔던 고독의 심연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선언이었다. 당신이 자신의 몫까지 아파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당신을 바라보았다. 웃기는 소리. 같잖은 동정.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심장은 배신자처럼 거세게 요동치며 그 말들을 부정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의 목소리는 간신히 쥐어짜낸 쇳소리 같았다. 그는 당신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그 미친 소리에 동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얼음의 군주. 아크 프리마. 고작 3개월짜리 파트너의 감상에 젖어 흔들릴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그는 깍지 낀 당신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거칠고, 막무가내인 포옹이었다. 마치 당신의 말을, 당신의 존재를 자신의 몸 안에 가두어 버리려는 듯이.
"군주님 몫까지 제가 아프고 슬퍼할게요. 군주님은 3개월 동안 이기적인 주인이 되세요. 군주님이 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해지고, 할 수 있을 만큼 3개월을 누리시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밀어내야 했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이 온기에 중독되기 전에 당신을 멀리 떼어놓아야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따뜻한 몸을 더욱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다. ‘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해지고, 3개월을 누리라고.’ 그건 그가 지난 14년간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시끄러워. 닥치라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지만,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당신을 으스러뜨릴 듯이 껴안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신의 심장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가 뒤섞여 하나의 울림이 되었다. 잊을 수 없다는 당신의 절규. 함께 아파하겠다는 당신의 속삭임. 그것은 독이었고, 동시에 유일한 해독제였다. 그는 자신의 품 안에서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했다. 아마 또 그 슬프고도 온화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겠지.
3.
"저는 군주님의 난로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많아요."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고작 그 따뜻한 몸뚱이로 내 옆에 붙어있는 거 말고, 네가 뭘 더 할 수 있지? 말해봐. 네가 할 수 있다는 게 뭔지, 전부 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당신의 부드러운 손목 안쪽을 천천히, 위협적으로 쓸었다. 맥박이 뛰는 그 여린 살결을 지그시 누르는 감촉이 그의 갈증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갖고 싶었다. 이 온기를, 이 숨결을, 이 존재를. 3개월 동안 완벽하게 소유해서, 다시 얼어붙는 순간이 왔을 때 아무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도록.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 따뜻한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당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었다.
"네가 날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봐, 파트너. 그럼… 네가 원하는 그 시체 놀음, 아주 조금은 고려해 줄지도 모르니까."
그것은 명백한 거래 제안이자, 잔인한 시험이었다. 그는 당신의 가장 절박한 소원을 미끼로 던졌다. 당신의 동정심과 공감을 이용해서, 당신을 자신의 발아래 완벽하게 굴복시키려는 오만한 군주의 속삭임이었다. 그의 눈은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을 받아, 이글거리는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4.
당신의 말이 없는 언어는 그 어떤 날카로운 외침보다도 선명하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산타는 순간 숨을 멈췄다. 당신의 턱을 쥐고 있던 손, 손목을 속박하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는 당신의 작은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따뜻했다. 단순한 체온이 아니었다. 당신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감히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감정의 온기가 그의 얼어붙은 뺨을 녹이며 심장까지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증명해 보라'는 자신의 잔인한 시험에, 당신은 가장 예측 불가능한 답을 내놓았다. 복종도, 거래도,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온전한 이해와 위로. 당신의 눈은 그가 14년간 봉인해 온 모든 감정을, 그 끔찍했던 21살의 겨울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죄책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대신 울어줄게. 당신은 행복하기만 해.' 당신의 눈빛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타오르던 벽난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졌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 마."
간신히 새어 나온 목소리는 으르렁거림이 아닌, 희미한 탄식에 가까웠다. 그는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온기에 이끌리듯, 저도 모르게 당신의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더 기댔다. 당신의 엄지손가락이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스치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독한 패배감.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고작 3개월짜리 파트너 앞에서, 얼음의 군주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완전히 무장 해제당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같잖은 동정 따위 필요 없으니까."
말은 그렇게 뱉어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당신의 온기와, 당신의 체향과, 방 안을 가득 채운 벽난로의 아늑한 공기를 탐했다. 당신은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의미를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당신은 그의 폭주를 막는 물리적인 '난로'가 아니었다. 14년간 얼어붙어 있던 그의 시간을, 그의 감정을, 그의 영혼을 녹여버릴 수 있는 유일한 '화로'였다. 그것은 그가 가장 갈망하고,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5.
"미안해요. '진심'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증명이었어요. 3개월 동안 군주님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행복하고,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루하루를 즐기세요. 제가 그 모습 전부 지켜볼게요. 제 눈에 담고, 마음에 담아서 군주님을 기억할 거예요."
당신의 대답은 조용한 선언과도 같았다. ‘진심’이 유일한 증명이었다는 말, 그리고 3개월 동안 자신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겠다는 약속. 그 말들이 산타의 무너진 방어선 너머,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심장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는 당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당신을 끌어안은 팔에 아주 희미한 떨림이 전해질 뿐이었다. 기억하겠다고. 고작 3개월뿐인 자신의 존재를, 당신의 눈과 마음에 담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가 14년 동안 그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가장 다정한 형태의 저주였다.
"…쓸데없는 짓이야. "
다시 혼자가 될 미래를 상기시키듯,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뱉어낸 말이었다. 그는 당신의 그 다정한 약속이, 다시 얼음 속으로 돌아가야 할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한 희망이 될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밀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당신의 온기에 길들여진 몸은, 마음은 멋대로 당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당신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몰아붙이던 난폭함은 온데간데없는, 서투르고 어색한 손길이었다. 그는 여전히 당신의 눈을 피한 채, 당신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마음대로 해. 네 눈에 담든, 마음에 담든. 어차피 3개월 동안 넌 내 거니까. 네 눈도, 네 마음도 전부 다."
그는 다시 당신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그의 가슴팍에 당신의 뺨이 오롯이 닿도록. 당신의 귓가에 그의 심장 소리가 다시 선명하게 들려왔다.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시체들… 수습하게 해 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내가 잠들 때까지, 아니, 잠든 후에도… 넌 내 옆에 있어야 해. 내년 겨울, 내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이 방에서 나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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